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처드 버튼 (문단 편집) === 카멜롯 === 반면 같은 시기 영화 쪽은 결과가 신통치 않았다. 남성편력이 심한 [[영국]] 귀족의 아내([[라나 터너]] 분)와 사랑에 빠지지만 마을이 자연재해로 위기에 처하자 결별하는 [[힌두교]] 인도인 의사 역으로 나온 <비는 오다>(1955), 동생이 [[링컨 대통령 암살 사건|에이브러햄 링컨을 암살]]한 직후부터 경력이 무너진 대배우 [[존 윌크스 부스|에드윈 부스]]를 다룬 (1955), [[알렉산더 대왕]]으로 나온 <알렉산더 대왕>(1956)은 흥행 실적이 좋지 않았다. 한편 1957년 버튼과 시빌 윌리엄스는 [[영국]]의 가산세를 피하려고 [[스위스]]로 도피하게 되고 여기에서 훗날 배우가 되는 장녀 케이트(Kate)가 태어났다. 이때부터 버튼은 돈을 보고 출연하는 경향을 죽기 직전까지 버리지 못하게 된다. 심지어 경력이 망가질까 염려한 주변 동료들까지 돈만 좇지 말라고 말렸지만, 버튼은 듣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번 돈으로 버튼은 광부 생활에 대한 높은 긍지로 자신의 돈을 거절한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형들을 모두 탄광에서 빼낼 수 있었다. 그나마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1959)는 흥행은 성공적이지 않았어도 연기는 자부할 정도로 좋았다.[* [[영국 영화]] 뉴웨이브의 도래를 알리는 영화로 꼽힌다. 즉 버튼은 영국 성난 젊은이의 첫 번째 얼굴이 된 셈.] 그러나 일본군에 의해 가라앉게 된 화물선에서 변장 중인 [[수녀]] [[조운 콜린스]]와 다투는 진부한 통속극 <이별>(1957), 말기암인 친구의 부탁을 받아 [[모르핀]]으로 [[안락사]]를 시키는 의사로 나오는 (1960),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주 지위가 부여되기 전의 [[알래스카]]를 배경으로 동업자였던 두 친구가 원수가 됐다가 화해하는 과정을 그린 (1960) 등은 연기마저 별로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무대 위의 버튼은 계속 전설을 만들고 있었다. [[아서 왕]]-[[기네비어]]-[[랜슬롯]]의 삼각관계를 그린 "Camelot([[카멜롯]])"의 제작 과정에선 특히 버튼의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돋보였는데, 함께 한 [[줄리 앤드루스]], [[로버트 굴렛|라버트 굴레이]], [[로디 맥다월]]은 작품의 성공이 전부 버튼 덕이라고 입 모아 말했다. 당시 앨런 제이 러너[* Alan Jay Lerner.]와 프레더릭 러우[* Frederick Loewe.] 콤비는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의 성공을 다시 보여줘야 한다는 큰 압박에 시달리고 있어 긴장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버튼이 모두를 잘 다독였다고 증언했다. 5시간 짜리 공연이 800회 가량 이어졌으며 [[1961년]] 버튼의 남우주연상을 포함해 [[토니상]] 네 개를 받아갔다. [youtube(uEiiMBjD90Q)] "카멜롯"은 [[존 F. 케네디]] 부부가 제일 좋아한 작품으로 집에서도 음반을 자주 들었고 아예 이를 케네디 정부의 상징으로 삼았다.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는 한 인터뷰에서 케네디와 자신이 [[백악관]]에 있던 시절이 [[미국]]의 [[카멜롯]]이며, 이후 다른 훌륭한 정권이 또 들어서더라도 카멜롯의 시절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언론에서는 [[존 F 케네디|케네디 정부]], [[케네디 가문]], 케네디 부부를 거의 구분 없이 카멜롯이라 지칭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220929_082035.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220929_082001.jpg|width=100%]]}}}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